어디 올려야 할까요. 으흥흥

2008년도 봄학기 열린작업장 글쓰기팀 밤비

 

병든 사슴아 힘내라

 

이번 한 학기는 길찾기 때와는 사뭇 다르게 나의 게으름을 제대로 표출한 시기였다. 길찾기 때도 매우 게을렀지만, 주니어 1학기를 시작한 이후로는 확실히 게을러졌다. 문제점은 어디에 있었을까? 가까운 곳에서 자취는 하는 것? 본래 잠이 많은 것? 아니면 피곤해서? 사실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 ON Going_Webzine ‘HAJARO’

‘ON going’에서 웹진 ‘하자로’의 편집국을 처음 맡았을 때, 처음 판돌들과 회의를 했을 땐 두근거려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진정 어떠한 각오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해야 했는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경험’에 민감하고, ‘첫 경험’엔 더욱 민감하고 들뜨는 내가 과연 ‘책임감’이니, ‘남에게 보여야 할 이미지’ 같은 것들을 신경이나 썼으랴.

그렇게 시작한 편집국 활동은 아주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는 영화처럼 나를 긴장하게 했다. ‘같이 있는’ 사람만 둘러보는 게 아니라, 센터 전체(열린작업장, 작업장학교 심지어 전혀 둘러보지 않았던 희망청의 소식까지)를 둘러보아야 하는 의무감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래서 처음 3월, 즉 4월호를 만들 때에는 정말 ‘닥치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자’라는 심보로 기사를 쓰고, 청탁을 했다. 청탁도 처음 해봤고, 기사를 쓰는 것도 처음, 하나의 큰 덩어리를 기획하는 책임자가 된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 하나라도 써야 안 혼나겠지’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다. 난 일반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안 혼나려고 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잔소리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나의 개인 글 작업의 주제가 ‘비평’이었던 걸지도). 몸으로 여러 가지를 익히느라 괭과 온달에게 신경도 안 쓰며 견디지 못할 20일을 보냈다. 그렇게 웹진이 나왔는데 그다지 뿌듯하지 않았다. 편집과 발송을 테디, 달갱 혹은 큐가 하셔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웹진 잘 봤다고 하는 친구, 댓글을 달았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힘이 되지도, 뿌듯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다지 뿌듯한 감정은 없다. 나 자신이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 호마다 발전하기도 하지만, 같은 문제점이 반복될 때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지각이었고, 그 다음은 팀원들의 부족한 체력이었다.

원래 아침에 죽을힘을 내서라도 일어났었는데, 웹진을 시작했을 때부턴 그렇지 않게 되었다. 알람이 울리면 바로 꺼버리고, 왜 안 오냐는 문자가 와도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게 들지 않았다(주니어 시작하기 전 인터뷰를 했던 당시, 길찾기 때의 나름 좋았던 이미지를 보겠다고 하셨던 판돌분들은 지금의 내 모습을 어떻게 보실지 참 궁금해진다). ‘아파서 지각한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졌고, 아파도 웹진은 발송되지 않으므로 발송이 늦어지게 마련이었다. 달리기가 느린 아이는 빠른 아이 앞에서 주눅 들 듯, 나또한 라이벌도 없는 상황에서 주눅 들었다. 일을 완벽하게 해내면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그 관심에 뿌듯해질지도 모른다. 관심이 받고 싶어 뿌듯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웹진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그런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일단은 지금의 가장 큰 문제부터 고치고 나의 뿌듯함을 되찾으련다.

- 개인글쓰기_비평

내가 개인 글 작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 ‘비평동무’가 처음으로 탄생했었다. 길찾기 때 같은 기수의 아이들 한 명씩 불러 충고랍시고 뭐라 뭐라 얘기해주었던 기억이 떠올라 참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도 멋진 비평동무를 삼겠다고 고민한 결과로 같은 팀인 온달에게 신청했고, 바로 수락해 기분이 좋았었다. 참고로 나는 말을 할 때 필터링(말을 골라서 하는 것)하는 습관이 없어 비평을 할 때에도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준다. 그래서 필터링 한 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과, 비평을 하기 전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해보자는 생각으로 ‘비평’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다. 분량을 꽤 넉넉하게 잡았지만, 주니어 쇼하자를 해본 적이 없어 쇼하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획도 크게 안 잡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수요일 아침이면 밥 먹듯이 지각했다. 오죽 하면 글이 매일 서론이었을까. 모모도, 괭도 매우 답답해했다. 여러모로 나의 작업들은 정 주행 보다는 역주행을 즐기는 것 같다.

결국 내가 내린 비평의 의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글을 읽어주거나 보여주고, 코멘트를 받으며 기획한 글을 고치는 작업이 꽤 재미있었다. 그러나 글 기획에 앞서 웹진과 엮어갈 것을 생각해서 썼다면 더 쉽게 썼으리라 생각한다.

- 언어_ Globish

세이랜과 함께하는 글로비쉬 프로젝트는 재미있기도, 재미없기도 했다. 이미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문법과 단어들이 지겨워서 들어갈지 망설이기도 했다. 게다가 타르한테 다시 한 번 글로비쉬를 배울 땐 복습하는 기분보단 ‘후딱 끝내자’라는 기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름 영어 영재라고 우대받았었다(그 땐 학원에서 영어 배우면 다 영재였다). 그래서 그 때 ‘to부정사’ 같은 것을 배웠고, 남들보다 영어를 빨리 배웠다. 그런 뒷 배경이 깔려있어 영어는 지루한 알파벳의 나열이었다. 그러나 웹진에서 ‘글로비쉬’에 대한 기사를 다루고, 프로젝트가 생긴 배경과 취지를 알고 나니, 내가 글로비쉬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어 이제는 영어를 더 배우고 싶은 기분이다. 무엇이든 왜 배워야하는지 정리를 하고 나면 목표가 뚜렷해져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되는 것 같다. 그저 ‘영어’일 뿐인데 많은 것을 얻었다.

- 인문학_ 니하우 베이징!

인문학, 인문학, 인문학! 길찾기 때부터 인문학은 즐겁지만은 않은 공부였다. ‘학’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거부반응이 생기더라.

김찬호 선생님껜 인문학을 처음 배우는 거라서 첫 골든벨부터 열심히 해보자는 굳은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매 수업 때마다 열심히 필기를 했고, 복습도 했다. 그러나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아침이라서, 10시에 중국어를 배워서 인문학은 조금 멀게 느껴졌다. 열린작업장과 작업장학교의 죽돌들이 모두 모이는 그 시간이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는 모른다. 의자가 불편하기도 했고, 카메라가 양 옆과 뒤에 있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이 자주 특강을 해주셨던 적도 있고, 강의의 대부분이 999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도 있다. 게다가 처음에 있던 과제들은 조금 빡셌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문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나는 인문학에 대해 ‘인간이 이루어낸 문화 등의 역사와 미래를 공부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었는데, 내가 느끼기에 이번 인문학 강의는 나의 정의와 비슷한 것을 배우긴 했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기본지식 없이 들은 것 같아 힘들었다.

나처럼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웹진을 맡은 사람이라면, 센터의 거의 모든 사람이 보는 배너 하나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지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나는 편집장이니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고, 조금은 날렵해 보이고, 공허한 모습만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 많이 알 것 같은 이미지를 어느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평소에 이미지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무슨 행동을 하건 칠칠맞게, 멍하게 굴었다. 그게 나의 본래 이미지니 사실 그대로의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혹시나 역시나, 이미지 관리는 어느 정도 필요하고, 내가 하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이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인문학 시간에 적어도 지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각은 편집장이건 아니건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지각으로 인해 나의 프로젝트 대다수를 후회로 덮어버렸다. 근본적인 문제 하나로 인문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크게 남는다. 다음 인문학 때에는 골든벨(한다면)을 향해 조금이라도 다가가 보고 싶다.

-자판기 아르바이트

길찾기를 수료하고 길찾기도 주니어도 아닌 어정쩡한 죽돌로 남아있을 때, 자판기 아르바이트를 신청했었다. 그리고 2월 중순부터 시작해 6월에 끝나는, 3개월 15일 동안의 ‘창업’이 시작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한 이유는 ‘부담감’이었다. 우리 집의 재정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한 달에 40만원씩 꼬박꼬박 고시원에 내야하는 나의 자취생활은 부담감을 더 크게 했다. 그래서 용돈이라도 벌어 집안의 부담감을 덜어주자는 생각에 자판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18살이고, 아직 청소년이며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야 하는 미성년자이다. 굳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는 없었고, 집에서도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잔걱정을 크게 부풀려서 생각하다보니 괜한 금전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정쩡하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돈 벌 생각을 하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15일 동안은 매일 관리하고 체크했지만, 웹진을 시작한 이후로는 자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모두 내게 품절 좀 없애라고 했지만, 지각도 잦고, 늘 피곤해 보이는, 게다가 혼자 살아서 잘 먹지 않은 얼굴에 의지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당시 심각했던 고민이라 누구에게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담임 모모에게 상담을 하고, 눈물을 보이고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모모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고, 나도 그것을 받아들여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나의 가장 큰 고민을 던져버렸다.

자판기 아르바이트를 제대로 못 한(안 한 걸지도) 것이 굉장히 후회된다. 제대로 된 의지로, 얻고 싶은 것을 확실하게 계획하고 했다면 지금처럼 후회하진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한 번 해보고 싶고, 마음이 확실할 때 다시 한 번 신청해보고 싶다.

 

이번 학기엔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처음’을 경험하고, ‘자판기’를 해보고, 주니어로서 많은 프로젝트들을 해보고, 편집장으로서 웹진을 기획하고, 편집진으로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좋은 관계도 맺고, 어색한 관계도 생기고), 기자로서 사진 찍기와 기사쓰기를 경험해보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의 주변 상황을 정리해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도 ‘쬐끔’은 길렀다. 다음 학기에 또 글쓰기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웹진 ‘하자로’의 편집장을 계속 하라고 한다면 싫다고 할 것이다. 아니면 덥석 물고는 놓지 않겠다고 발버둥칠지도 모른다. 내가 글쓰기팀을 고른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듯이, 다음 학기에 선택하는 작업장도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은 선에서 시작해 명확한 지점을 잡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이다. 이런 내 모습이 융통성 없게 보이거나, 한심해 보이거나, 이상해 보여도 잠시 참아주길 바란다. 내 본래 모습은 이러하고, 내 즐거움은 그 안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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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세하게 프로젝트별로 다 썼네그려.. 수고하셨소..
    그리고 '칠칠맞다'가 아니라 '칠칠치 못하다' 라는 말이 맞답니다.

  2. 컹 수정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