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유. 동시간적인 또 다른 가능성.
봄 학기에는 늦겨울도 초여름도 섞여 있지 않았다. 봄의 춘곤증만 4개월간 지속됐다. 멍하고, 멍하고, 멍하고, 멍했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계속적으로 쓰고 읽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지? 간혹 학습계약서를 읽었었다. 학기 초에 세웠던 계획들은 참으로 번지르르하고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뭐, 지금에 와서야 얘기다. 다시 하자를 다니기로 마음먹고 선택한 것이 글쓰기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알아서 웹진 편집국으로 속해지더니 웹진을 만들어야 한댄다. 웹진? 웹진이 뭐지? 처음 기획회의에 들어앉아서 한 시간 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저거다. 영문도 모른 채 웹진을 한다고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고 이것저것을 했다. 4월까지도 왜 하는지 몰랐다. -처음에 웹진과 On Air, On Going에 접근, 분산된 많은 채널을 연결. 기타 등등을 열심히 설명해주신 세이랜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결국 지금도 웹진을 하고 있다. 말로는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다. 하자에서는 그래야 한다. 다만 몸이 안 따르고 영문을 모를 뿐이다. 항상 번듯한 이유가 필요하고 그것을 말로 잘 설명해야 한다. 항상 머리가 하얘진다.
왜 하자 밖과 안은 다르지? 뭐가 다르지?
이중생활을 한다. 하자에서와 그리고 하자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의 경계가 나누어진다. 표정, 말투, 자주 사용하는 단어, 행동 모두가 달라진다. 그냥 드러나는 겉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전부터 우스갯소리로 이중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다들 조금씩 했었던 부분이고- 내가 밖에서 하는 것과 하자에서 하는 것을 연결하지 못하고 또 그러려고 하지 않았던 것. 항상 다르다고 말하는 그것이, 무엇이 다르고 어떻게 다르고 그래서 그것들이 연결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고민. 힘들어서 어영부영 안하고 넘어가버린 부분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들이 각자의 색깔이나 문화적인 차이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경계가 생겨버린 것이다.
다르지 않은 것들..글을 쓰고 노래를 하는 것.
글 쓰는 것, 영화를 찍어 상영하는 것, 그림을 그려 전시하는 것, 노래하는 것.
이것들은 모두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여러 방법. 그래서 다르지 않은, 같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노래하는 내가 그렇게 이번 학기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자신의 글을 소리 내어 읽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낭독의 즐거움을 알았다. 글을 쓰면서 소리 내어 읽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에 어울리는 문장을 써보기도 하면서 설레임을 느끼기도 했다. 내 이야기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이야기에 대한 구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글을 읽고, 쓰는 즐거움을 조금씩 알아갔다. 파스칼 키냐르가 이야기 했었던 독자와 작가는 다르지 않고,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했던 것을 조금은 느낀 걸까.
글을 쓰면서 같은 부분에서 맴돌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작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나, 내가 끄집어내야 할 부분에서는 입을 다물고 그 주변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모모와 밤비가 내 글을 읽으면서‘모르겠다. 너무 돌려 말한다.’며 많은 질문을 했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더 해 달라’는 말을 엄청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난 또 아니라며 ‘괭의 변’을 줄줄 늘어놓았었다.
점점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다. -물론 현실과 사실이라는 단어에 의구심을 품고 있으며 모순을 느낄 때가 많다-
스무 살이 되었을 그 즈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글 뿐 아니라 사람을 만나 말을 할 때에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하기가 어렵다. 점점 더 나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어렵다.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글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고 싶었다. 감상적이고 추상적 일거면 차라리 솔직하게 드러내졌으면 했다. 내 글은 이도저도 아니다. 글쓰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런 고민과 생각을 많이 했고, 모모와 밤비의 생각들을 들으면서 조절해나가는 부분이 있었다고 본다. 내가 보는 내 글과 다른 사람이 보는 내 글에 대한 생각들을 알게 되면서 좀 더 구체적인 고민을 했었다. 어떤 단어를 쓸 것인지,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에게 내 속사정까지 줄줄 늘어놓고 싶지 않다. -일종의 글을 쓸 때의 태도문제이기도하다. 여러 부분에서 착각하고 있다. 세밀하게 글을 쓴다는 것이 속사정을 줄줄 늘어놓는 것은 아닌데- 싫은 것은 싫은 거다. 어떻게 더 설명할 수가 없다.
다르지 않다고 말하지만 다른 것들. 그래서 어려웠던 일.
초등학교 때 가족신문, 그 이후로 기사를 써보았던가.. 나에게 자아라는 것과 정체성이라는 것이 성립되고 나서의 기사작성과, 취재와, 인터뷰와, 청탁과, 칼럼작성은 낯설고, 그리고 지긋지긋하게 어려웠다. 기사 한 번 쓰는데 모모를 몇 번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찍는 사진마다 흔들리거나 내용을 담지 못해 사용할 수 없는 사진들이 훨씬 많았고 약속한 기한을 못 지키기도 하고, 편집자의 편지를 15번은 다시 쓰면서,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한 번은 청탁을 부탁하러 찾아가서 청탁메일을 보내겠다는 의사전달을 하였는데, 상대방은 내가 청탁하는 과정이 매우 서투르고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나름 준비하고 찾아갔다 생각하였고, 청탁메일을 상세하게 잘 써서 보내면 된다고, 어렵지 않게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러 갈 때의 태도는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여러 번 고민해야 하고 잘 정리해서 가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미숙한 면이 많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여 회의시간의 맥이 다 빠져버리기도 했었고 기간 내에 준비하지 못해 책임감에 대해, 방법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알아갔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글을 청탁하는 방법과, 기사를 쓰는 방법과 그것들을 웹진에 담는 방법들을 배웠다.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달하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사건들을 시각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이것들을 모두, 내 몸이 익숙하게끔 학습하지는 못했다. 한 학기동안 다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고, 조금씩 알아갔다고 말했던 저 문장이 가깝겠다. ‘경험’이 전부 학습이 될 순 없겠지? 그렇지만 모르지 않으니까. 나는 웹진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많으니까..
또 다르게 말하기.
일상적인 회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배워야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는 준비해서 들어오자고 했었건만 첫 시간, 그리고 그 다음 수업이 되어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 수업방향이 바뀌었다. 나는 또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수학공부 한 번 해보려고 펼친 수학정석 책에서 첫 장 ‘집합’만 죽어라 공부하고 덮어 버리는 그 기분. 오랜만에 만끽했다. 결국 일상적인 회화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처음 뵙겠습니다.’와 ‘가타가나 받아쓰기’만 하다가 일어가 끝났다. 10월에 일본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느린새에게 개인과외를 받기로 했고, 이제 정말 파바박 움직일 때가 되었다.
Optical English를 시작하면서는 짧은 문장이라도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얼마 전 홍천 뮤직페스티벌 러브캠프에서 만난 외국인과 즐겁게 대화했다. 이제 외국인과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중간에 그만두게 된 것이 여러모로 찝찝하지만 잠깐의 시간들이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깊이. 앎, 그리고 삶.
‘청소년을 위한 하자인문학2: 니하우 베이징’
시기에 맞는 주제였다. 베이징 올림픽으로 중국에 많은 관심과 시선이 집중된 지금. 자연스럽게 중국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번의 수업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인문학 카페로 연결되었고 그 시간들로 일상의 화두를 건드리고 건져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루어진 주제들이 많아서 혼란을 겪거나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부분에 대해 한 학기동안 깊이 공부하는 방법이 있겠고, 그리고 여러 부분에 대해 조금씩 던져 놓으면 스스로 그것을 알아가고 학습하는 방법이 있겠다. 인문학2는 후자의 방법이 있었지 않나싶다. 그렇지만 아직 인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중국에 거대한 관심이 생기거나, 다루어졌던 주제들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스스로 알아보고 공부하는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좀 더 나의 작업과 언어들이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얼마 전 인문학 리뷰모임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의 작업. 이 부분은 하자에서의 작업 부분이다. 글쓰기 프로젝트나 웹진을 하면서 인문학은 연결되는 부분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무슨 수업을 들었더니 이것이 이렇게 연결되었어!’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중국 영화에 관련된 수업을 듣고 예전에 보았던 패왕별희를 꺼내어 다시 보았고, 그리고 그 느낌이 내 노래에 묻어날 수 있었던 것. 인문학 수업이나 인문학 카페에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내 생각이 되어 그것들이 음악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 그 단어와 문장들이 노래로 불리어지는 것. 이런 것들을 말하면서 인문학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라고 말 할 수 있겠지?
개인적인 인문학을 통해 현실을 읽어내고, 움직이면서 생각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으며 개념들을 배워가는.
인문학을 통해 일상의 대화 내용, 방법들을 바꾸었으면 좋겠다. 논쟁이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학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했던 것이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일은 꼭 하는 것이었다. 일을 추진해서 마무리하는 기본훈련과 전반적인 흐름을 잘 읽어가는 것. 이런 것들을 터득해가길 바랬다. 주변 상황에 휘둘려 그 상황들을 확대해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스스로 불쌍한 인간을 만들어버리고 합리화 시킨다든지 불필요한 것에 매달리고 중요한 사실을 똑바로 볼 줄 모르는 것들. 이것들이 고쳐졌다기보다는 그런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뭐, 그러지 않았다는 거겠지. -엄청 그랬었다-
내가 어려운 단어 몇 개를 더 알게 되고 그래서 죽여주는 기사를 작성한다든지, 혹은 (공연단이나 잠시 촌닭을 하던 때에) 기타나 드럼이나 잠베 연주나 기타 등등의 테크닉이 눈에 띄게 늘거나, 이런 눈에 보이는 자질구레한 스킬을 배운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배웠다. 나의 생각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에는 책임감이 필요하고 약속이 중요하고 그리고 어렵지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웹진과 글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알았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내가 음악을 한다고 해서 배워야 하는, 그래서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화성학을 배운 것하고 같이 비교될 수 없다. 내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것. 나를 단단하게 만든 저런 학습들이 나를,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 있게 했다.
입학할 때에는 -아..까마득하다. 도대체 언젠지- 무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먼 미래였을까? 가까운 내일은 잘 보이지 않았다. 멀고 먼 미래를 즐겁게 상상했다. 그래서 주니어수료나 졸업 같은 것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었다. 주니어 4학기 정도부터 욕심이 생겼다. 어쩌면 나에게 주니어수료라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5학기 째에 1년을 쉬면서 점점 모호해졌다. 그래서 이번 봄 학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왜 주니어수료를 하고 싶은 것인지 나에게 수료가 왜 필요한지. 이 질문들이 그 비어있던 시간들을 지내고 벅차오른 설레임 속에 고이 묻힌 채 얼렁뚱땅 여기까지 온 것일까?
무엇을 학습했냐는 모모의 질문에 머릿속에 문장은 가득한데 단어가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내가 무엇을 학습했는지 확신이 없어서? 아니면, 학습한 것이 없어서? 아니면 그 학습이라는 단어에 주눅이 들었던가? 나는 내가 하자에 있는 4년 동안, 겪었던 그 많은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말, 개념 이런 이야기들이 하자에서 배운 것들로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질문에 이런 모든 것들이 뿌옇게 흐려졌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지? 횡설수설...
다른 방식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럼, 하자에서의 대화방식은 무엇이고, 그 다른 방식의 대화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 정말이지 하자에서는 말을 잘해야 하고,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들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하여 글을 논리정연하게 써야하는 것에 지친다. 오늘 리뷰모임에서 나왔던 문장 하나가 머리에서 계속 울린다. ‘긴 대화가 안 되면 떠나야지.’-말을 잘해야 하는 시점이지만 앞, 뒤 설명은 생략 한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 노래에 관련된 생각만 하고 싶다. 그것에 대한 공부를 하고, 음악을 듣고, 연습을 하고, 공연을 준비하면서 좀 더 여러 사람, 많은 사람에게 내 노래를 들려주고 싶고 그것에 대해 골몰하고 싶다. 이것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슬럼프에 대한 정의가 뭐지? 일단 나는 집에 쳐박혀서 음악도 듣지 않았고 만들지도 못했고 노래도 못했고 먹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간혹 ‘아..나 노래해야 하는데..’라는 문장이 떠올랐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모든 것이 귀찮고 허망하게 느껴져 집구석에서 빌빌대는 것이 슬럼프라면 내가 그랬다. 그런 나를 움직이게 해줬고 그 기본적인 욕구를 하자에 다니면서 느끼게 됐다. 불은 지펴진 것 같다. 마른 장작이 필요하다. 엄마 손 잡고 문방구를 지나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게임기를 보고 침 질질 흘리며 사달라고 조르는, 그런 우발적인 흥분상태는 아니다. 그런 것 정도는 이제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나는 약간은 조급하다. 남의 다리 긁으면서 시원한 척 하고 있기에는 얼마 있지도 않은 양심에 털 하나가 쫑긋 솟는다. 이제 첨벙 뛰어들고 싶다.
요즘에 내가, 자꾸 나에게 의문이 생긴다. 질문을 던지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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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서 복사해서 그대로 붙였더니, 글 읽기가 쉽지 않네요.
글 읽기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착란의 매직아이 에영.
메모장에 복사해서 한번 더 읽는 수고를.. 암튼 잘 읽겠음.